관상기도(觀想祈禱)에서 생명진화와 천지인합일을 이루는 씨알 생각기도로

박재순l승인201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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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에서 쓰는 관상기도는 이성의 관조(觀照, theoria)에서 나온 말이다. contemplation(관상기도)는 ‘성소(聖所)와 함께 성소 안에서’란 말인데 그리스어 theoria(관조, 이론)의 번역어로 쓰였다. 플라톤에게서 테오리아는 우연적인 물질적 실체들의 변화와 생성을 넘어서 이성으로 선(善)의 형상(形相), 이데아를 보는 것이다. 이성의 관조를 중시하는 그리스철학의 영향으로 기독교에서는 거룩한 장소에서 우연적인 존재자들을 넘어서 모든 존재의 근원과 목적이고 참된 실체인 ‘하나님을 보는 것’을 contemplation(관상기도)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을 관상기도라고 한 것은 이성의 관조를 최고선과 행복이라고 본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철학은 수학에 토대를 둔 철학이다. 그리스인들이 강조한 이성은 수학에서 가장 순수하고 뚜렷이 드러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과 정신의 실체와 본질, 원인과 목적, 토대와 근거로 본 ‘이데아’도 ‘보다’라는 말에서 왔고 이론, 관조를 나타내는 테오리아도 ‘보다’라는 말에서 왔다. 이성은 수학의 숫자와 기하학적 도형을 가장 명확하고 확실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는 생명의 주체와 전체는 볼 수 없다. 생명과 정신의 내적 깊이와 자유, 전체적 연결과 소통은 볼 수 없다. 관상기도는 눈으로 보는 것을 떠나서 텅 빈 맘에서 논리, 개념, 이미지를 버리고 산 실재로서 하나님을 알아차림(awareness)에 이르려 한다. 텅 빈 맘에서 논리, 개념, 이미지를 버리는 것은 불교에서 무념무상의 삼매경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본다는 생각이 관상기도의 바탕에 있기 때문에 불교의 삼매경과는 달리 인식론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논리와 개념과 이미지를 버리고 하나님을 보고 아는데 이르려는 관상기도는 이성적 관조의 성격과 자세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관상기도는 생명의 주체와 전체인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과 사귐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사건, 얼과 신의 동적 활동을 담아내기 어렵다. 관상기도는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생명사건의 동적 성격, 죽음에서 신생에 이르는 창조와 혁신을 체험하기 어렵다. 부활은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생명과 얼은 하나님,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나아가는 것이다. 솟아올라 나아가는 생명과 영의 동적 사건적 활동을 관상기도는 담아내지 못한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텅 빈 맘으로 하나님을 보고 만나기를 기다리는 관상기도는 내가 깨지고 죽고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건을 준비하는 과정으로서는 의미가 있고 높이 평가될 수 있다.

하나님을 보려는 관상기도의 기본생각은 우상숭배를 철저히 거부하고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한 히브리정신과 어긋난 것일 수 있다. 히브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나는 나다!”고 선언하는 주체의 하나님, 인류, 생명, 우주를 끌어안는 전체 하나의 하나님이다. 어떤 형상과 모습으로도 볼 수 없는 존재다. 믿음은 신을 보는 게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고 신께로 돌아가는 행위다. 신께로 돌아가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인간이 물질과 본능의 잠에 빠져 있고 물질과 본능의 속박과 굴레에 매어 있는 무력한 죄인이라고 생각한 신학자들은 인간이 신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오는 것임을 강조했다. 믿음은 신이 오기를 믿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일도 되었다. 그러나 생명진화와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믿음은 신이 내게 오고 내가 신께로 가는 일이다. 기도와 명상과 예배는 신이 오고 내가 가는 일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이 오고 내가 가면 생명과 정신의 큰 변화가 일어난다. 스스로 깨지고 죽고 새로 태어나고 새 하늘, 새 땅이 열린다. 생명과 정신의 씨알이 싹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기도와 명상과 예배를 통해서 몸과 맘속에 심겨진 신적 생명의 씨알이 스스로 드러나고 스스로 싹이 트고 스스로 꽃이 피고 열매와 씨알이 맺게 해야 한다. 생명과 정신의 주체와 전체, 신적 생명의 작용과 활동, 창조와 진화, 자기초월과 신생은 제 속에서 스스로 일어날 뿐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구원 해방과 신생이 일어나고 있다. 인성의 혁명, 개벽, 정신혁명이 일어난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깊은 내면에서 일어난 일은 볼 수도 없지만 보려고 해서도 안 된다. 남의 깊은 속을 보고 알았다는 것은 착각이고 잘못된 주장이다. 보았다고 해도 부분과 단면을 본 것이다. 사람 속에 계신 하늘, 하나님을 어찌 볼 것인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참된 주체이고 전체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과 사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이는 대상으로 만들면 참된 주체와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생명세계를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다 드려다 보았다는 것은 다 알아 보았다는 것이고 계산하고 측량해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정신의 깊은 속은 볼 수 없이 무한히 깊고 어두운 것이고 헤아리고 측량하고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다. 계산하고 측량해 보았다면 물건으로 기계로 여긴 것이고 산목숨으로 영혼으로 본 것이 아니고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측량하고 계산해 보고 다 알아버렸다면 인격적 관계와 사귐은 끝난 것이고 자람과 변화, 신생과 자기초월은 없는 것이다.

인성교육은 주체와 전체가 하게 되게 하여 스스로 실현되고 완성되게 하는 것이다. 내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무도 볼 수 없다. 내 속에서 내가 깨지고 부서지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나도 남도 볼 수 없다. 내가 깨지고 돌파되고 새로운 생명과 정신의 차원이 뚫고 들어오는 사건을 고요히 바라볼 수는 없다. 나의 죽음을 나의 태어남을 내가 볼 수 없다. 내가 나를 초월하는 것을 나도 남도 볼 수 없다. 인성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은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탈바꿈하고 자기초월과 고양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내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내게 말씀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창조하고 변혁하고 해방하고 구원하는 이다. 생명진화와 천지인합일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은 볼 수 없는 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몸의 한계, 시공간의 한계, 인간의 이성과 정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따라서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다.

참된 명상과 기도는 보는 데 있지 않고 스스로 하게 되게 하는 데 있다. 인성의 주체와 전체가 ‘하고 되게’ 하는 것이 생각기도다. 주체와 전체는 볼 수 없다. 주체의 깊이와 자유에서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명상이고 기도이고 예배다. 생명진화와 천지인합일을 실현하여 몸, 맘, 얼을 주체와 전체로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이 참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주체의 깊이와 자유에서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르는 것이 인성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이며 생명진화와 천지인합일을 이루는 것이고 참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동학의 강령주문(至氣今至願爲大降)과 시천주주문(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世知) 그리고 한울님을 모신 사람의 상태를 나타내는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는 생명과 정신의 동적 사건과 변화를 잘 나타낸다. 내적인 빛과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는 퀘이커의 명상예배도 성령체험과 감동을 역동적이고 생동적으로 드러낸다.

씨알사상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생명진화와 천지인합일을 이루고 몸, 맘, 얼을 통합 일치로 이끌고 하늘, 하나님과 연락 소통하는 것이다. 생각기도, 생각명상이 참된 기도이고 참된 명상이고 참된 예배다. 내 속에서 나와 너와 그가 살아나고 세워지고 키워지고 높아지고 새롭게 되고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한다. 너와 그의 속에서 내가 살고 새롭고 자라고 솟아오르게 되어야 한다. 나와 너와 그 안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일하시고 기쁘고 환하게 빛나야 한다.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과 구원이 일어나고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고 우주와 자연만물과 생명과 인류가 새로 태어나고 구원되고 해방되어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해야 한다.


박재순  p994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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